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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겠습니다


한국과 북한이 일본 지배에서 벗어나고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언젠가도 비슷한 말을 했지만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네요). 예전에는 조선이었는데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었군요. 광복이 되고 바로 일본이 저지른 일을 알고 친일 정리도 제대로 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지요. 그것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독재나 군사정부가 나타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바로 못했다면 조금씩이라도 해야 했는데,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말을 할지도 모르겠네요. 시간은 사람 일과 상관없이 잘 흘러가고 이런저런 일을 잊게 합니다. 시간이 흘러도 예전에 일어난 일을 잊지 않게 하려고 역사책을 쓰는 사람이 있는 거겠지요. 시간에 조금이라도 이길 수 있는 게 있다면 기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오래 남아야 그렇겠지만. 광복이 되고도 오랜 시간이 지난 1991년에 김학순 님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걸 밝혔습니다. 예전에는 이것만 알았는데, 이 책을 쓴 이토 다카시가 김학순 님을 만나서 다른 것도 알게 됐습니다. 김학순 님은 딸 아들이 있었는데 다 죽었습니다. 어쩌다 그런 일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는 결혼하지 않고 자식도 없이 혼자 힘들게 사는 사람이 더 많았겠습니다. 이토 다카시는 일본 사람이어서 한국 사람은 만날 수 없는 북한에 사는 분도 만났습니다. 이걸 보고 저도 이제야 생각했습니다. 북한에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있다는 걸 말이에요(북한과 가까운 중국에도 있겠네요). 그때는 조선이었으니 어디에서나 여자(아이)를 끌고 갔겠지요. 일본 사람이 만나자고 했을 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만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을 참고 만나고 말했습니다. 일본사람은 싫지만 자신이 겪은 일을 지금 사람한테 알리려고 그랬겠지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거나 부모가 없어서 힘들게 살던 사람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고 일본군 위안부가 됐습니다. 어떤 분은 한국(북한) 지도를 무궁화로 수놓고 일본은 나팔꽃으로 수놓았다고 끌려가서 고문받고 정신을 차려보니 후쿠오카였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걸로 사람을 끌고 가고 고문하다니. 일제강점기에는 그런 일이 많았겠지요. 일본군 위안부로 끌고 간 여자아이들이 조선사람이라는 걸 숨기려고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일본 이름을 지어준 거겠지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죽이고 가슴을 도려내고 성기에 총을 쏘기도 했답니다. 그런 모습을 여자들한테 보게 하고 죽고 싶지 않으면 말을 잘 들으라 했어요. 일본사람이기에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한 걸까요. 전쟁이 그렇게 만든 것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사람이 베트남 전쟁 때 잔인한 짓을 했다고도 하잖아요. 이 책 빨리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빨리 보면 안 될 것 같아서였는지 보기 힘들어서 그랬는지. 둘 다가 아닐까 싶어요. 그렇다고 잘 말하지도 못하다니. 지금까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본 건 아닙니다. 김숨은 많은 자료를 보고 《한 명》을 썼던데, 그거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지금 듭니다. 소설 쓰기는 더 쉽지 않았겠지요. 몇달 전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만나고 그 이야기를 담은 김금숙 만화 <풀>을 만났습니다. 어쩌면 그것을 봐서 이 책도 본 건지도 모르겠네요. 이 책은 한국사람이 아닌 일본사람이 썼다는 데 뜻이 있습니다. 일본에도 자기 나라 역사를 제대로 알고 많은 사람한테 알리려는 사람 있을 거예요. 그런 사람이 많다면 좋겠습니다. 아니 많지 않아도 그런 사람이 끊이지 않고 나오기를 바랍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이런저런 증거를 없애려고 많은 사람을 죽였지요. 거기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도 있었습니다. 살아남은 분이 있어서 우리가 그때 일을 아는 거네요. 그분들 이제 몇 분 남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여전히 자신들한테 책임이 없다 말합니다. 돈을 받고 그 일을 했다거나 억지로 끌고가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때 여자아이를 끌고 간 사람이 증언하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고 그런 사람도 거의 죽었을 것 같네요. 돈이 중요한 건 아니지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분들이 바라는 건 일본이 진심으로 사과하는 겁니다. 그 분들이 아직 살아있을 때 일본이 사과해야 할 텐데요. 우리는 이런 아픈 역사 잊지 않아야 합니다. 희선
한국 정부는 2015년 12월 28일,
일본 정부가 10억 엔 규모의 예산을 출연하는 조건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합의했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합의였다
일본 정부의 사죄 또한 없었다

2017년 1월 18일, 박차순 할머니가 별세했다. 이날 기준으로 생존자는 39명뿐이다. 일본군 위안부 에 관한 기억은 급속히 풍화해간다. 기억하겠습니다 - 일본군 위안부가 된 남한과 북한의 여성들에는 세상을 떠난 남한 여성 아홉 명과 북한 여성 열한 명의 증언과 사진이 담겼다.

저자 이토 다카시는 포토저널리스트다. 1981년부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오가면서 원자폭탄 피해 실태를 취재했다. 그 과정에서 약 7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피폭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일본은 물론 한반도에 사는 피폭자들을 취재했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많은 피해를 보았던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게 취재한 피해자는 800여 명에 이른다. 그는 말한다. 일본인 저널리스트가 해야 하는 일은, 일본에 의해 피해를 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규모에 대해서는 8만 명에서 20만 명 등의 수치가 있지만 모두 추정에 불과하다. 하지만 규모와 관계없이 상당히 많은 여성이 국가에 의해 성노예가 되었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 오점을 남긴 큰 사건이다. 이만큼 대규모로 여성을 군대 전용의 성노예로 만든 국가는 일본뿐이다. 저자는 일본의 과거를 일본인이 직접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분노와 슬픔을 정면에서 마주하겠다고 결심했다.


한국어판에 부쳐
들어가며

피해자 증언
노청자_내 존재가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귀분_조선인 특공대와 함께 노래하며 울었습니다
김영실_일본군 장교가 어린 도키코의 머리를 베어버렸습니다
리상옥_우리 셋은 처녀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동원되었습니다
심미자_정신을 차리니 후쿠오카의 위안소였습니다
김대일_150명의 여자를 나란히 세우고 목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강순애_공습이 심해져도 위안소에는 군인들이 줄을 섰습니다
황금주_벌거벗은 여자는 일본군 장교에게 반항하다 성기에 권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곽금녀_죽인 위안부들을 지하실에 버렸습니다
문옥주_한 사람이 하루에 30~70명을 상대했습니다
리계월_임신하면 아무짝에 쓸모없으니 죽어라
강덕경_근로정신대로 갔다가 위안부가 되었습니다
리복녀_군인은 그녀의 머리를 잘라 끓는 물에 넣었고, 그것을 마시라고 강요했습니다
김학순_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르포르타주
빼앗긴 기억을 찾아_일본군 위안부 심달연 할머니의 강제 동원 현장에서
일본에 대한 한, 전쟁에 대한 한_위안부였음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북한에 있는 성노예 피해자들_가늠할 수 없는 고뇌 끝에서 토해낸 과거
무궁화에 둘러싸여_일본군 위안부 김학순 할머니의 죽음

지은이 후기
옮긴이 후기